준경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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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뿌리 준경묘(강원도기념물 제43호)답산기 정 판 성
1. 일자 : 2011년 3월 27일(일) 오후 2시 2. 소재 :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江原道 三陟市 未老面 活耆里) 산 149 3. 가는길 : 삼척에서 태백 가는 38번 국도를 따라 가면 활기리가 나온다. 활기리에서 오른쪽으로 진입하여 1.5km쯤 가면 준경묘 입구가 나온다. 주차장과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다. 입구에서 도보로 1.8km(30분 소요, 800m정도는 가파르다)거리에 위치해 있는데 백두대간룡(白頭大幹龍)의 중심에 있다. 4. 준경묘(濬慶墓) : 강원도기념물 제43호이다. 조선 태조의 5대조이며 목조 이안사(穆祖 : 李安社)의 아버지인 이양무 장군(李陽茂 將軍)의 묘이다. 활기리에서 준경묘까지는 팻말을 따라 1.8km 보도 코스이다. 묘역까지 시멘트 포장길이 이어지지만 차단기가 굳게 내려져 있어 걸어야 한다. 고갯마루를 넘어서면서 울창한 금강송림(金剛松林 : 黃腸木)이 모습을 드러내고 동녘을 향해서는 금강송과 활엽수가 빽빽하게 비포장길에 그늘을 만들어준다. 고종 광무 36년(1899)에 묘소를 수축하고 제각과 비각을 건축하였다. 이 일대는 울창한 송림으로 되어 있어 원시림의 경관을 구경할 수 있는 산자수려한 곳이다. 이곳의 낙락장송인 황장목(黃腸木)들은 경복궁 중수 때 건축재로 쓰였다고 한다. 목조가 한 도승의 예언대로 백우금관(百牛金棺)으로 선친을 안장한 뒤, 5대에 이르러 조선을 창업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준경묘는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4㎞ 떨어진 곳에 목조의 어머니 이씨의 묘인 영경묘(永慶墓) (강원도기념물 제43호)가 있다. 목조 이안사가 함경도 덕원으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별세하였으므로, 수 백 년 동안 실묘(失墓)하였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이후 태조를 비롯한 태종 ․ 세종 등 역대 왕들이 선조인 이양무의 묘소를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여 묘를 찾았으나 그 진위(眞僞)가 분명치 않아 고심하다가 1899년(고종39)에 이곳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제각(祭閣)과 비각(碑閣)을 세웠다. 이태조는 즉위하자마자 삼척에 있는 조상 묘를 찾도록 하였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태조는 삼척을 조상묘가 있다하여 부(府)로 승격시키고 홍서대(紅犀帶)를 하사하였다. 1447년(세종 29)에야 이 묘를 찾았다고 한다. 5. 전설 : 고려 말의 어지러운 시대를 만나게 된 목조 이안사(穆祖 李安社)는 예기치 않던 하나의 시련에 봉착하였다. 당시 전주에는 안렴사(按廉使)와 산성별감(山城別監) · 주관(州官) 등 고급 관리가 있었다. 당시는 (私兵)을 가진 무신들이 전횡하던 시대인지라, 안렴사와 산성별감 그리고 전주관아의 벼슬아치 이안사와 세력 다툼이 있었는데 산성별감은 이안사에게 죄를 씌워 역적으로 몰아 그 가족까지도 모두 죽이려 하였다. 이안사는 늙은 아버지 이양무(濬慶)을 등에 업고 식들을 모두 데리고 밤에 도망을 쳐 전주에서 멀리 떨어진 삼척에 도달하였다. 하루는 이안사 집에 사는 머슴이 나무를 한 집 해놓고 나무 그늘 아래서 쉬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사람소리가 들렸다. 머슴은 숲 속에 몸을 숨기고 그들을 짘켜 보았다. 노승(老僧)이 동자승(童子僧)에게 말하기를 이 자리는 5대손에 제왕이 날 자리라고 가르치어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소 일백 마리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관(棺)은 금으로 싸서 장사를 지내야 제대로 발복이 된다고 하였다. 머슴은 집에 돌아와 이안사에게 이 말을 전했고 이 말을 들은 이안사는 연로한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실지 몰라 묘 자지를 찾고 있던 차에 귀가 번쩍 뜨였다. 이안사는 생각에 잠겼다. 살림이 여유가 없어 소 백마리와 금관을 도저히 구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다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소 백(百)마리는 흰(白)소 한(一)마리로 대신하여 백(百)을 만들고, 금관은 보릿짚이 황금빛이 나므로 이것으로 관을 싸면 되겠구나 하고 마음을 먹었다. 얼마 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는 흰 소 한 마리를 잡아 제사 지낸 후 아버지 관을 보릿짚으로 잘 싼 다음 노승이 동자승에게 일러준 자리에다 장사지냈다. 그 후로 얼마 있었는데 전주의 산성별감이 관동(關東)의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삼척으로 새로 부임하였다. 이안사는 안렴사의 눈에 띠면 죽음을 당하므로 남은 식구들을 데리고 함경도 덕원(德源)으로 멀리 피신을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양무의 5대손 이성계가 태어나 조선을 건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백우금관(百牛金棺)으로 묘를 쓴지 약 150년만의 일이다. 5. 풍수지리 (1) 용(龍) 산맥이 1,404m높이의 청옥산으로부터 내려와 1,353m의 두타산을 이루고 우로 황장산으로 내려오다 산봉우리를 하나 세우고 여기서부터 90도로 방향을 바꾸어 사방팔방으로 지각(枝脚)을 내고 행도(行度)를 사방으로 활짝 벌려 이끌어나간다. 아래로 가면서 기복과 고저가 있고, 좌우로 날개를 펴고 살아 움직이는 듯하고 비틀거리며, 꿈틀대는 모습이며 소리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듯 하는 것이 생룡(生龍)이다. 또한 산줄기가 크며 굵직하게 퍼져나가고 활동이 씩씩하고 자유스러워 마치 호랑이가 숲을 빠져나가듯, 목마른 용이 바다로 달리듯, 용이 하늘을 오르듯 강성한 형태이어서 강룡(强龍)이다. 용이 이상 더 좋을 수가 없다. (2) 혈(穴) 혈(穴)은 땅의 기가 모이는 곳으로 묘를 쓰거나 집을 지을 지점을 말한다. 혈의 생김새를 유혈(乳穴), 겸혈(鉗穴), 와혈(窩穴), 돌혈(突穴)로 구분하는데, 젖가슴 모양으로 생긴 것을 유혈이라 하고 이를 다시 여러 유형으로 나누는데 준경묘의 혈은 양팔의 중간에 유방이 길게 늘어져 있는 장유혈(長乳穴)이다. 길이가 너무 길면 용맥이 활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길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장유혈은 길이가 적당하다. 이 장유혈의 끝 부분에 묘가 있다. 좌청룡과 우백호에서 나온 물줄기가 혈 앞에서 합류되고 또 혈(묘 자리)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간혹 돌들의 끝이 약간 보이면서 약간 도드라져 아미사(蛾眉沙)를 이루고 있어서 혈증(穴證)이 분명하다. (3) 사(沙) 사(沙)라고 하면 사신사(四神沙)를 말하는데 이는 혈의 사방을 둘러싼 산이다. 혈의 뒤에 있는 것을 현무(玄武), 앞에 있는 것을 주작(朱雀), 좌측에 있는 것을 청룡(靑龍), 우측에 있는 것을 백호(白虎)라고 하는데, 현무가 우뚝 솟아 있고 여기서부터 꾸불꾸불 맥이 내려오면서 혈을 감싸 안는다. 좌청룡과 우백호가 꾸불꾸불 내려오면서 또한 수 십 번 기복을 하고는 혈 앞에서 우뚝 솟아 봉우리를 이루고는 꾸불꾸불 꿈틀거리며 1.5km정도를 내려가다 오십천(五十川)을 만나 멈춘다. 내청룡과 내백호가 감싸 주고 그 밖으로 외청룡과 외백호가 2겹으로 감싸주니 기가 새어날 길이 없다. 안산은 본신 안산으로 우백호가 안산을 대신한다. 안산 너머의 조산은 혈에서 보이지 않으나 위로 조금 올라가면 조산이 멀리 보인다. 내명당은 그 높은 산줄기 안에 조그마한 하나의 분지(盆地)를 이루고 있는데 적당히 넓어 제격이다. 풍수적으로 안산이 현무나 혈을 압도하면 하인이나 신하가 득세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준경 묘는 안산의 높이에 비해 혈이 좀 낮은 감이 있으나 아미사(蛾眉沙)의 혈증(穴證)이 있으니 그 자리가 제자리이다. 그러나 묘의 현재 위치 위에도 혈증이 있다면 고려해 볼만 일이었다. 육수방(六秀方)은 간(艮)병(丙), 손(巽)신(辛), 태(兌=酉)정(丁)의 6개 방위를 말하는데, 간(艮)과 병(丙), 손(巽)과 신(辛), 태(兌=酉)와 정(丁)이 짝을 이루어 이들 방위에 청명(淸明)하고 수려(秀麗)한 산이 있으면 부귀하고 자손이 번성한다. 그런데 준경 묘는 손방(巽方)에 금체의 아름다운 좌청룡의 봉우리가 있고, 신방(辛方)에 현무(玄武)의 아름다운 산봉우리가 있어 육수 중의 하나를 형성하니 좋다. 준경 묘의 우백호의 기운이 좌청룡을 압도하는 형국(形局)이기 때문에 조선왕조는 좌청룡에 해당하는 맏아들이 수난을 당하는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것(27대 중 7대만이 맏아들이 왕위에 오름)과 준경 묘의 좌청룡과 우백호가 서로 마주보며 대결하는 형국이라 조선왕조는 골육상잔(骨肉相殘)의 피비린내 나는 다툼이 계속되었다는 풍수가의 말이 전해져 오고 있으나 이는 잘 못이다. 준경 묘 자리에서 보면 좌청룡이 내려오다가 간방(艮方)에서 우뚝 솟아 금체(金體)의 봉우리를 만들고, 우백호는 내려오다가 손방(巽方)에서 우뚝 솟아 금체(金體)의 봉우리를 만드는데, 혈에서 우백호의 봉우리는 더 가깝고 좌청룡의 봉우리는 더 멀다. 그리고 우백호의 봉우리가 좌청룡의 봉우리보다 약간 크다. 풍수적으로 좌청룡과 우백호의 끝이 서로 마주보아야 형제간에 다툼이 생기는 것인데 준경의 묘에서는 우백호에서 나온 산 밑 가닥의 일부를 좌청룡 산 밑 가닥의 일부가 옷깃처럼 감싸주고 있고 좌청룡과 우백호의 산줄기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1.5km를 나란히 뻗어내려 가다가 오십천(五十川)을 만나 멈춘다. 중국 왕실의 역사를 보면 형제간은 다툼은 말할 것도 없고 형제간에도 서로 죽이고, 할머니가 황제인 손자를 죽이기도 한다. 중국 왕실들의 골육상잔은 조선의 왕실보다 더했다. 중국 한고조(漢高祖)가 죽자 부인 여후(呂后)는 어린 손자 공(恭)을 황제로 세웠는데, 어떤 일로 반항하자 황제를 죽이고 나이 어린 홍(弘)을 황제로 세운다. 당나라 고조 이연은 같은 어머니에게 낳은 건성, 세민, 원길 아들 셋을 두고 있었는데 왕위를 노리고 건성과 원길이 합세하여 세민을 죽이려하자 세민이 이에 대항하여 형과 동생, 조카들을 죽이고 당태종(唐太宗)이 된다. 권력을 앞에 두고는 다툼이 있기 마련이다. 준경 묘는 우백호에서 만들어진 조그마한 계곡이 혈을 직통으로 찌르고 있어서 곡살(谷殺)이 되는데, 이 계곡의 끝을 석축을 해서 삼각형으로 벌려놓아 살(殺)을 없앴다. 비보(裨補)를 해서 살을 없앴는데 참으로 잘 한 일이다. (4) 수(水) 좌청룡과 우백호에서 물이 흘러나와 혈을 감싸주는데 이 중에서도 우백호에서 나온 물이 요대수(腰帶水)로 혈을 감싸주고 흘러나간다. 비가 올 때는 물이 풍부하지만 가물면 물이 말라버릴 것 같았다. 음(陰)인 산과 양(陽)인 물의 크기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도 산에 비해 물이 작아 독음(獨陰)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앞 명당에다 600m2 크기의 4각형 연못을 만들었다. 오른쪽 백호에서 나간 물을 왼쪽의 청룡이 이를 받아 역관(逆關)해서 합금처(合襟處)를 만들고 구곡수(九曲水)로 1.5km를 흐르다가 큰 냇물 오십천(五十川)을 만나 합류하고는 왼쪽(북쪽)으로 흘러나간다. 수구가 꽉 막혀 기가 빠져나가지를 못한다. 좌청룡과 우백호의 골짜기와 내명당이 평지이어서 물이 서서히 흘러나가니 그 이상이 없다. (5) 좌향(坐向) 입수의 향은 혈 위의 행도를 바꾼 지점에서 측정하면 신향(辛向)이고, 승금(乘金)에서 측정하면 유향(酉向)이다. 왼쪽 청룡 쪽의 물이 크므로 여기를 득수(得水)로 보고 측정하면 해방(亥方)이 되는데 이는 사국포태수법으로 병(病)에 해당되므로 흉수(凶水)이다. 수구(水口)의 향은 갑향(甲向)이다. 묘의 좌향(坐向)은 신좌을향(辛坐乙向)으로 되어 있다. 수구를 갑향(甲向)으로 해서 88향법으로 보면 사파(死破)에 해당되어 좋지 못하다. 그러나 구성법(九星法)으로 보면 문곡(文曲)에 해당되는데 이는 흉성(凶星)이다. 수구는 흉성에 해당되어야 좋으므로 구성법으로는 합법이다. 좌향을 볼 때 88향법과 구성법(九星法)을 적용하는 것이 대종(大宗)을 이루나 좌향을 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니 어떤 좌향법을 적용했는지는 그 묘 자리를 잡은 풍수가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수구가 갑묘향(甲卯向)이고 좌향이 신술향(辛戌向)일 때는 소황천살 (小黃泉殺)에 해당된다. 그러나 어떤 풍수가는 소황천살(小黃泉殺)을 무시하고 대황천살(大黃泉殺)도 일부만 인정한다. 필자도 소황천살은 이론적 근거가 없는 억지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준경 묘의 수구 향은 갑향(甲向)인데, 묘의 향은 을향(乙向)이므로 우선수(右旋水)이고, 혈판(穴坂)의 향은 묘향(卯向)인데 묘의 향이 을향(乙向)이므로 좌선룡(左旋龍)이다. (6) 형국(形局) 혈(穴)이 있는 주산(主山)을 중심으로 주변의 산세(山勢)는 어느 특정한 생물이나 사람, 사물의 모습을 닮는다. 비슷한 사물, 사람, 생물 등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붙이는데 이를 물형(物形) 또는 형국(形局)이라고 부른다. 형국의 모양에 따라 특유의 기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맹호출림형(猛虎出林形)은 사나운 사자가 숲 속에서 힘차게 뛰쳐나오는 형상이니 여기에 있는 묘 자리는 용맹한 힘을 가지고 있어 자손 중에 용맹을 떨치는 장수가 나온다는 것이다. 준경 묘의 형국은 장군안검형(將軍按劒形)이다. 이 형국은 손으로 칼자루를 쓰다듬는 격이다. 장군처럼 생긴 산봉우리 옆이나 밑에 칼처럼 생긴 산줄기가 있다. 장군형(將軍形)의 산봉우리는 삼각형이나 금체(金體)에 가깝다. 혈은 칼자루나 칼에 가깝다. 또 안산과 주변에 깃발처럼 생긴 산, 북, 격구(擊毬) 등이 있다. 준경 묘의 주변 산들을 보면 주산과 현무의 산봉우리가 삼각형으로 장군형이다. 그리고 현무에서 가운데로 내려오는 맥이 칼의 모양을 하고 있고, 양쪽의 좌청룡과 우백호가 혈을 완전히 감싸고 있어 칼집 형상을 하고 있고, 묘 앞에 우뚝 솟은 좌청룡과 우백호의 산봉우리는 마치 북과 격구의 모양이다. 그리고 청룡과 백호의 산줄기가 내려오면서 삼각형의 많은 산봉우리를 많이 만들어 많은 깃발이 늘어서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7) 기타 이 묘는 상석(床石)이나 망주석, 석등, 문무인석 등 석물(石物)을 일체 설치하지 않았다. 묘에서 좀 떨어진 지점에 비각(碑閣)을 짓고 그 안에 비 갓이나 귀부(龜趺)가 없는 갈(碣)을 세웠는데 비 앞면에는 전서(篆書)로 대한 준경묘(大韓濬慶墓)라고만 써져 있다. 수맥(水脈)은 없었고 묘에 지기(地氣)는 충만했다. 안산이 높으니 묘를 좀 위에 썼으면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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